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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금융 구조·지식 고양이 목표"…챔플레인 칼리지의 '금융 교양'

'현재 금융 위기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은 어떤 상품인지 잘 모르고 서명한 많은 서브프라임 융자자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고객들에게 제대로 정보를 전달하지 않고 수수료 수입만을 중시했던 브로커들과 이들을 암묵적으로 눈감아준 은행들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뉴욕타임스는 이와 같은 금융위기를 일으킨 사슬 구조를 깨기 위한 금융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최근 재학생들에게 기본 금융 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챔플레인 칼리지를 소개했다. 주로 디지털 테크놀러지 과목들이 많은 재학생 2000여명인 챔플레인은 '금융 교양'(Financial sophistication) 과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학교의 데이빗 핀니 학장은 "많은 평범한 대학생들조차 기본적인 금융 구조와 지식이 부족하다"며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간단한 금융 문제들과 지식을 고양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크레딧 기록이 금융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어떤 분야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등이다. 특히 학생들의 경우 크레딧 기록을 쌓을만한 환경이 아니어서 미리 교육시키는게 가장 중요하다는게 학교의 생각이다. 예산(budgeting) 역시 강조되는 항목이다. 수입과 지출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문제 역시 크레딧카드 사용 등과 연계해 개인의 금융 관리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기 때문이다. 학교는 보다 효율적인 수업을 위해 관련 정치인과 업계 인사를 초청한 학생 컨퍼런스도 계획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와 같은 금융 교육을 위해 학교측은 연 12만달러 정도를 쓰고 있지만 전국적인 표준 교육 모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2011-01-12

[선진 금융회사의 명품 리더십] 2인자를 키워라

미 상장기업 최고경영자 65% 후계자와 승계 절차 이미 마련 금융회사는 대부분 후계 정해놔 올 7월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흥미로운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상장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상대로 경영권 승계계획(Succession Planning)에 대해 벌인 설문조사 결과였다. 세계적인 기업 CEO 325명이 참여했다. 이들 가운데 '66.5%가 분명하고 구체적인 승계계획과 절차를 마련해 놓았다'고 대답했다. 미 월가의 상장 금융회사들 가운데 승계 계획을 마련해놓은 비율은 더 높았다. 조사에 응한 CEO 81%가 승계계획을 갖고 있다고 대답했다. 국내 금융그룹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한국 금융그룹들은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차기 CEO를 간택한다. 그렇지 않으면 1인 지배체제가 이어지면서 피로 현상을 보이곤 한다. 월가 금융그룹들이 말하는 승계 계획은 종이쪽지가 아니다. 그들은 후계자 후보군을 미리 선정한다. 그들에게 회사 내 기획과 재무 등 중요 보직을 맡겨 회사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을 길러준다. 주기적으로 능력과 적성을 평가해 최종 단계에서는 1~2명만 남긴다. 이렇게 훈련된 후계자들 덕분에 기존 CEO가 돌발적인 사건이나 공직 진출 등으로 회사를 떠나더라도 경영 공백이 최소화된다. 이런 승계 프로그램을 가장 잘 활용한 곳이 바로 골드먼삭스다.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이 회사 역사를 쓴 찰스 엘리스는 "골드먼삭스는 오너 가문 출신들이 2선으로 물러난 이후 경영권을 둘러싼 내분이 발생하기 쉬운 상황이었다"며 "하지만 CEO들이 자신의 영향력 유지보다 회사의 운명을 더 생각해 승계작업을 미리 벌였다"고 말했다. 골드먼삭스 승계 프로그램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바로 로버트 루빈(72)과 스티븐 프리드먼(73) 발탁이었다. 두 사람은 골드먼삭스가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른 1990~92년에 공동 CEO였다. 루빈은 트레이딩(자기자본 투자) 부문을 프리드먼은 투자은행 부문을 책임졌다. 두 사람은 정반대 성격이었지만 환상적인 짝꿍을 이뤘다. 당시 골드먼삭스 사람들은 "차가운 머리(루빈)와 따뜻한 가슴(프리드먼)이 조화를 이뤄 회사를 이끌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10년 동안 경영수업은 기본 루빈과 프리드먼의 조화는 오랜 승계 작업 덕분이었다. 둘은 10년 넘게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루빈과 프리드먼은 80년 나란히 경영위원회 멤버로 발탁됐다. 골드먼삭스가 파트너십 체제였던 당시 경영위원회는 5~9명으로 구성됐다. CEO가 위원장을 맡았다. 위원회는 크고 작은 사안을 모두 감독하고 결정했다. 두 사람을 후계자로 발탁한 사람은 '두 명의 존(John)'이라 불리는 인물들이었다. 바로 존 와인버그와 존 와이트헤드였다. 두 명은 70년대 중반 공동 CEO가 됐다. 와인버그는 골드먼삭스의 주춧돌을 놓은 시드니 와인버그의 아들이다. 와이트헤드는 자신의 능력으로 승진을 거듭한 인물이었다. 두 명의 존은 각각 투자은행(와인버그)과 트레이딩(와이트헤드)을 나눠 이끌었다. 80년은 두 사람이 공동 CEO가 된 지 거의 10년째 되는 해였다. 그들은 내분을 피하고 경영권을 넘겨줘야 회사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들처럼 공동 CEO 체제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회사 규모도 커졌고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투자은행과 트레이딩 부문을 한 사람이 이끌었다가는 분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두 명의 존은 그동안 여러 보직을 맡기며 테스트한 후보군 중에서 루빈과 프리드먼을 후계자로 내정했다. 루빈과 프리드먼을 경영위원으로 발탁해 회사 사람들에게 차기 대표임을 분명히 했다. 또 루빈과 프리드먼이 회사의 전략적인 사안을 직접 다루고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 이런 훈련 시간이 10년 정도 이어졌다. 지도자 수업을 받는 동안 루빈은 첨단 금융이론을 받아들여 골드먼삭스의 트레이딩 기법을 선진화했다. 50년대 개발돼 상아탑 속에서 잠자고 있던 포트폴리오 투자이론을 월가 투자은행 가운데 처음으로 적용해 회사의 수익을 늘린 것이다. 프리드먼은 최고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가 80년대 들어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는 틈을 타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발행한 주식과 채권을 인수했다. 골드먼삭스는 설립 초기부터 후계자감을 물색해 훈련시켰다. 골드먼은 독일계 유대계인 골드먼과 삭스 가문이 혼인을 계기로 동업하면서 탄생했다. 하지만 오너 가문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대공황 사이에 차례차례 2선으로 물러났다. 대신 심부름꾼으로 입사한 시드니 와인버그를 대학교육과 경영수업까지 시켜 CEO로 선임했다. ▶승계 계획은 권력투쟁 억제해 시드니 와인버그는 오너 가문이 2선으로 퇴진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권력투쟁이 발생할 수 있음을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의 장악력이 막강한 50년대 후반 거스 레비를 발탁해 잠재 후계자로 훈련시켰다. 그 훈련 기간이 10여 년에 달했다. 시드니는 60년대 중반 레비에게 일상적인 경영을 맡겼다. 대신 경영위원회를 설치해 그의 독단적인 결정을 견제하도록 했다. 또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사실상 수렴청정이었다. 시드니는 69년 숨을 거뒀다. 골드먼삭스는 권력투쟁을 겪지 않았다. 준비하고 있던 거스 레비가 자연스럽게 경영권을 행사했다. 이런 골드먼삭스의 전통은 현재 CEO인 로이드 블랭크페인까지 이어지고 있다. 때로는 경영진 사이의 갈등도 있었고 심지어 쿠데타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당 기간 경영훈련을 받으며 사내 구성원들과 교감한 후계자들이 경영권을 곧바로 장악했다. 경영권 불확실성을 미리 없앤 덕분에 회사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의 권력투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남규 기자

2010-10-07

[선진 금융회사의 명품 리더십] 막장 드라마를 막아주는 파트너십

잭 웰치 전 GE 회장은 “사내정치는 지분 분산이 잘 돼 있어 설립자 또는 오너의 자취가 뚜렷하지 않는 대형 금융회사의 일상사”라고 말했다. 좋든 싫든 늘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얘기다. 금융회사 내부자들은 연봉과 승진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경쟁한다. 가장 치열한 일합(一合)은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놓고 벌이는 쟁탈전이다. 승자의 지위가 늘 반석 같지는 않다. 그가 빈틈을 보이면 쿠데타에 의해 쫓겨나기도 한다. 세계 최대 투자은행 골드먼삭스의 존 코자인(63·전 뉴저지 주지사)은 1999년 1월 대표 자리에서 축출됐다. 당시 넘버 2인 헨리 폴슨(64·전 재무장관)이 존 손튼(56·브루킹스연구소 이사장), 존 테인(55·전 메릴린치 CEO)과 함께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서였다. 폴슨 쿠데타로 CEO 자리 차지 쿠데타의 명분은 코자인의 독단과 독선이었다. 쿠데타 한 해 전인 98년 롱텀캐피털 사태가 발생하자 코자인은 월가 자체 구제작전을 주관했다. 그는 글로벌 금융시장 파국은 피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거액의 회사 자금을 선뜻 구제금융으로 내놓았다. 이런 통 큰 행보가 화근이었다. 대표인 코자인이 거액의 회사 돈을 쓰기 위해서는 골드먼삭스의 당시 경영위원회 승인을 받아야 했다. 코자인은 상황이 다급하다는 이유로 그 절차를 무시했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폴슨이 그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경영위원회를 소집해 런던에 출장 가 있는 코자인을 해임해 버렸다. 월가 대형 금융회사 CEO들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실적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사내정치 테크닉을 부린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이 대표적인 기법이다. 쿠데타로 CEO 자리에 오른 폴슨은 동맹자인 손튼과 테인을 늘 경계했다. 의도적으로 그는 '굴러온 돌' 로이드 블랭크페인(56)을 키웠다. 블랭크페인은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골드먼삭스 입사 시험에서 탈락했다. 대신 상품투자회사인 J-애런에 취직했다. 그런데 80년대 초 골드먼삭스가 J-애런을 인수합병(M&A)하면서 블랭크페인은 골드먼삭스 일원이 됐다. 블랭크페인은 한때 퇴출 1순위였지만 충성심과 저돌적인 업무추진 유머감각 덕분에 생존해 폴슨의 총애를 받았다. 2인자 자리인 최고운영책임자(COO)에 올랐다. 폴슨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에 의해 재무장관에 임명된 2006년 블랭크페인은 정난공신(靖亂功臣)인 테인과 손튼을 제치고 골드먼삭스 수장 자리에 올랐다. 그가 이끈 상품 트레이딩 부문의 좋은 실적과 함께 폴슨의 이이제이가 한몫했다고 월가 전문가들은 말했다. 워버그는 내분으로 끝내 붕괴 사내정치 때문에 산산이 쪼개진 금융그룹도 있다. 영국의 전설적인 투자은행 SG워버그는 사내갈등을 삭이지 못했다. 끝내 스위스 거대 금융그룹 UBS와 미국 JP모건 등에 분산.흡수돼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워버그는 독일계 유대인인 지그문트 워버그가 1946년에 세운 투자은행이었다. 앵글로색슨계가 터줏대감 노릇하고 있던 런던 금융중심지 더시티(The City)에서 공격적인 비즈니스로 성공을 거둬 메이저 투자은행이 됐다. 프랑스계인 파리바와 손잡고 미국 증권사를 인수하는 등 자본규제가 심한 70년대 글로벌화를 앞서 추구했다. 워버그는 신출내기 금융자본이 어떻게 기존 판을 깨고 성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설립자 지그문트가 82년 10월 숨을 거두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절대 권력자가 사라지자 영국계.미국계.독일계.스위스계 임원들이 치열하게 권력다툼을 벌였다. 인종과 문화적 갈등까지 곁들여져 타협이 불가능했다. 그들은 회사를 쪼개기로 했다. '글로벌 금융 사바나'에서 분열은 곧 죽음이기 십상이다. SG워버그는 스위스 UBS와 미국 JP모건의 공격을 받았다. JP모건은 워버그의 미국 법인을 해치웠다. 본사 격인 영국의 SG워버그는 95년 UBS에 흡수됐다. 그해 5월 뉴욕 타임스는 "20세기 금융혁신을 이끈 워버그가 사내정치 때문에 끝내 파편화됐다"고 보도했다. 미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도 90년대 중반 혹독한 사내 갈등을 겪었다. 투자은행 내부의 고질병인 투자은행가들과 트레이더의 싸움 탓이다. 투자은행가들은 증권인수와 M&A 등을 담당한다. 그들은 기업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증권인수 계약 등을 따낸다. 회사 내부에선 '귀족'으로 불린다. 반면 트레이더들은 품위와는 거리가 멀다. 우주항공 통제실과 비슷한 트레이딩룸에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글로벌 시장에서 난타전을 벌인다. 육두문자를 서슴없이 내뱉는다. 90년대 이후 투자은행에서 최고 수익을 창출했다. 하지만 회사 내에선 '천한 것들'로 통했다. CEO 승진 등에서도 투자은행가들에게 곧잘 밀려 불만이 가득했다. 리먼의 투자은행가와 트레이더들은 끝내 94년 갈라섰다. 트레이딩 부문은 증권회사인 프리메리카에 흡수됐다. 남은 투자은행 부문만 리먼브러더스의 이름을 유지하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2008년 9월 15일 '독재자' 리처드 풀드의 고집 때문에 파산했다. 한국엔 갈등 완충제가 부족 골드먼삭스는 갈등을 딛고 세계 최대 투자은행으로 성장한 반면 SG워버그는 공중 분해된 까닭은 무엇일까. 전미경제연구소(NBER) 이사인 랜덜 모크는 기업지배구조 논문과 보고서에서 "파트너십(Partnership) 전통이 사내정치의 중요한 완충제"라고 주장했다. 유한책임제를 뼈대로 한 주식회사와는 달리 파트너십은 기본적으로 무한책임제다. 파트너들은 회사 채무 등에 대해 지분 한도를 넘어서까지 책임져야 한다. 파트너 한 사람의 과실 때문에 모두가 파산할 수 있는 구조였다. '공멸의 두려움'이 상존했다. JP모건과 골드먼삭스 등은 오랜 세월 파트너십 체제였다. 골드먼삭스는 다른 투자은행보다 더 오래 파트너십 체제를 유지하다 99년에야 상장했다. 파트너십은 "이윤 추구라는 이기적인 동기를 바탕으로 한 운명 공동체"라고 모크는 말했다. 이런 공동체 정신이 자리 잡은 회사에서는 권력다툼이 발생하더라도 고성이 담장 너머까지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99년 골드먼삭스 쿠데타의 파열음이 내부에선 컸지만 밖에선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코자인이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발표됐다. 동업자에 대한 배려심이 발휘된 것이다. 오랜 파트너십이 낳은 운명 공동체 문화는 골드먼삭스 등이 기업공개(IPO)를 통해 주식회사 체제로 바뀐 뒤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 등 신흥국의 금융회사들은 파트너십 체제를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주식회사 체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운명 공동체 정신이 싹틀 기회가 거의 없었다. 내분의 파열음이 담장 너머까지 울려퍼지기 십상일 뿐만 아니라 법정 다툼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강남규 기자

2010-09-30

[선진 금융회사의 명품 리더십-1] 제왕적 CEO의 밝음과 어둠

우리보다 앞서 걸어간 미국.유럽 금융그룹들도 비슷한 내분을 겪었다. 일부는 잘 수습했고 일부는 파산의 수렁에 빠졌다. 선진 금융그룹의 명품 리더십을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리먼 파산은 폴드 철권통치 때문…성공 CEO가 조직을 사유화하고 반대파 숙청해 다양성 제거하면 시장·환경 변화에 속수무책 월가의 플레이어들은 1994년을 '금융 스캔들의 해'로 기억한다. 오렌지 카운티 파산 등 하루가 멀다 하고 금융 스캔들이 불거졌다. 반면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먼삭스 사람들은 그해를 '리더십 위기의 해'로 기억한다. 수뇌부의 갈등과 알력 때문에 리더십 위기가 발생해 골드먼삭스가 생사의 기로에 서서 흔들거렸기 때문이다. 사태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스티브 프리드먼(73)이었다. 그는 당시 골드먼삭스의 단독 대표였다. 애초 로버트 루빈(72)과 함께 회사를 이끌었지만 루빈이 92년 클린턴 행정부에 들어가면서 프리드먼이 거함 골드먼삭스의 단독 조타수가 됐다. 파트너들은 새 대표를 선정해 공동 대표 체제를 유지하라고 요구했다. 프리드먼은 "내 아이디어와 비전에 따라 회사를 경영해 보겠다"며 단독 대표를 고집했다. 프리드먼은 단독 경영권을 장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전까지 경영권을 두 사람에게 분점시키는 게 골드먼삭스의 전통이었다. 프리드먼의 권한과 영향력은 막강해 보였다. 그의 지휘 아래 주식 인수 자산운용 상품거래 자기자본 투자(트레이딩) 증권 세일즈 부문으로 구성된 '복잡한 유기체' 골드먼삭스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프리드먼은 오너나 주요 주주가 아니었다. 실적을 바탕으로 조직원들의 충성과 주주들의 지지를 유지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누가 내 자리를 넘보지 않을까'하는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자신의 의견을 더 고집했다. 자신이 조금만 약해 보이면 누군가 도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임원들은 트집을 잡아 쫓아냈다. 투자 방향과 전략을 결정할 때도 제왕적 CEO의 행태 그대로였다. 그는 93년 국채 값이 강세를 보인다는 쪽에 베팅했다. 특히 일본 국채 값이 많이 오를 것으로 봤다. 그의 예상대로 국채 값이 오르면서 93년까지 골드먼삭스 순이익은 급증했다. 골드먼삭스는 B급 투자은행에서 메이저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프리드먼의 리더십과 성공신화는 뜻하지 않은 사건(리스크)에 의해 무너졌다. 94년 초 앨런 그린스펀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기준금리를 전격적으로 올렸다. 91년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유지해온 저금리 기조의 중단이었다. 일본 경제도 장기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미 지방채와 일본 국채 값이 급락했다. 골드먼삭스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프리드먼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난파선의 쥐처럼 임직원들이 줄줄이 골드먼삭스를 떠났다. 회사 리더십도 공동화됐다. 결국 94년 겨울 프리드먼은 물러났다. 이후 '헨리 폴슨(64)-존 코자인(63)' 공동 대표 체제가 출범해 사태를 가까스로 수습했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도 비슷한 위기를 경험했다. 로버트 볼드윈(90)은 70년대 중반부터 83년까지 모건스탠리를 이끌었다. 볼드윈 치세 동안 모건스탠리는 가장 공격적으로 비즈니스했다. 자기자본을 주식.채권.파생상품에 베팅했다. 증권 세일즈 부문을 설치해 증권시장의 새 주역으로 떠오르는 각종 펀드에 주식과 채권을 팔아 많은 수익을 거둬들였다. 모건스탠리는 볼드윈의 지휘 아래 10배 이상 성장했다. 이런 볼드윈의 위세와 공적도 80년 더블딥(이중 침체) 앞에서 무너졌다. 당시 미국과 유럽 경제는 극심한 침체에 빠지고 남미엔 외채위기가 발생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극도의 불확실성에 휘청거렸다. 볼드윈은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 증권 인수와 트레이딩 부문 사이에 갈등도 불거졌다. 결국 볼드윈은 83년 축출되다시피 모건스탠리를 떠나야 했다. 절대권력의 몰락은 힘의 공백과 내분을 초래하는 법이다. 로버트 그린힐 등 2인자 그룹이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였다. 내분은 회사 위상을 추락시켰다. 모건스탠리는 투자은행 정상의 자리에서 2위 그룹으로 밀려났다. 미 금융 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은 미국 비즈니스에서 "거대 금융그룹은 지분이 골고루 분산돼 있어 한때 좋은 실적을 보인 CEO가 제왕적 리더로 변하기 쉬운 구조"라며 "망한 금융회사의 표면적인 이유는 투자 실패지만 진짜 이유는 1인 리더십의 한계일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리먼브러더스 파산이다. 리먼은 모기지 관련 자산에 투자했다가 2008년 9월 15일 무너져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리처드 풀드(64)의 철권통치가 파산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애초 리먼브러더스는 골드먼삭스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 잘 대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외부 투자를 제대로 유치하지 못해 끝내 파산했다. 바로 풀드의 독재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가 조금이라도 위협받을 듯하면 외부 투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고집 앞에선 워런 버핏(80)도 속수무책이었다. 버핏은 골드먼삭스에 앞서 리먼에 투자하려고 했다. 하지만 풀드가 버핏이 단순한 재무 투자자여야 한다고 고집했다. 버핏이 투자는 하되 경영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버핏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는 이사 선임과 경영진 해임 등 주주로서 권한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사람이다. 풀드가 버핏의 간섭을 싫어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94년 이후 리먼은 그의 리더십 아래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다. 세계 4위 투자은행으로 발돋움했다. 트레이딩 부문에서는 골드먼삭스 다음으로 많은 수익을 거뒀다. 리먼은 '풀드를 위한 풀드의 풀드에 의한' 투자은행이 됐다. 주주들이 따로 있었는데도 말이다. 전 컬럼비아대 경영학 교수인 레너드 세일즈는 CEO의 두 얼굴에서 "한때 좋은 실적을 낸 리더가 권위적으로 바뀌면 회사 조직을 사유화하려고 든다"고 지적했다. 조직의 사유화는 '견제세력 제거→경영 논리.전략의 단순화'를 말한다. 이후 조직은 시장과 환경의 변화에 둔감해지고 위기를 맞는다. 강남규 기자

201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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